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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데일리뉴스 - [오재일원장의 족보칼럼] 촌수에 비친 달라진 세상

보건복지타임스 2008. 1. 8.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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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일원장의 족보칼럼] 촌수에 비친 달라진 세상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있다면 과연 뭐일까?
홍재희 기자 (기사입력: 2008/01/08 11:39)

이런저런 것들이 있을 테지만 사람마다 다 다를 것이다. 우선 어린 아이는 엄마가 소중할 것이요 어미는 제 새끼일 것이다. 사람 아닌 동물 역시도 이 이치는 똑같다. 사내아이는 커서 제 눈의 계집을 그릴 것이요 계집 역시 멋진 사내를 그릴 것이니 때가 되면 다들 그런 현상들이 일어난다. 그런 인연들이 무르익어 일가를 이루게 되고 또한 씨앗을 맺어 한 식구를 이루면서 인간의 종족은 유지되는 것이다. 이래서 이러한 가족이 소중함은 틀림없는 일이다. 이중에 하나라도 어그러지면 진한 사연을 낳게 되고 때로는 그 질곡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목숨이 갈리는 설디설운 대목도 펼쳐지는 것이다.

이러한 식구들 사이에 나타나는 모습들은 촌수에 따라 달라진다. 촌수가 영(零)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부사이가 가장 진하게 나타난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하나를 찍으면 남이라 듯이 갈라서기라도 한다면 그만 웬수(怨讐)가 되고 만다. 또 만약에 님이 죽는다면 그 길을 따라갈 만큼도 하지 않는가? 부부사이는 촌수로 따지면 굳이 영촌(零寸)이 되겠지만 촌수로는 따지는 법은 아니다. 거기서 낳은 자식인 일촌(一寸)부터 따지는 법이고 촌수의 대상은 아니다. 일촌간은 흔히 천륜의 제일로 여겼다. 이를 범하면 이미 사람이 아닌 짐승이나 굴러다니는 돌로 여겼던 것이다.

속담에 자식을 잃으면 가슴에 묻고 부모는 땅에 묻는다는 말이 있다. 진하기가 부부보다도 더할 것 같지마는 세상사 내리사랑을 나타낸 말일 뿐이다. 예전 부부는 사랑을 기본으로 하기 보다는 가문을 중시하는 데에 비중을 두었기로 부모가 맺어준 대로 사는 여인네들 중에는 억한 심정에 마음을 자식에게 더 쏟기도 하였던 터였다. 부부는 가족을 이루는 기본 틀이었고 한사코 백년해로를 빌었으되 도중에 갈라선다는 것은 인생의 끝장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다음이 이촌(二寸)인 형제자매지간이다. 벌써 한 칸 벌어진 한치 건너 두치 사이다.

그런데 촌수 좀 안답시고 조손(祖孫)간에도 굳이 이촌(二寸) 운운하기도 한다. 이 경우는 이촌(二寸)에 해당된다더라도 대수(代數)로 따져야지 촌수로 따질 일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증조와는 촌수가 삼촌(三寸)이 되는데, 그것을 삼촌조(三寸祖)라든가 고조를 사촌조(四寸祖)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은 삼촌(三寸)인 숙질(叔姪)간이다. 다정하기가 형제보다 더할 때가 많은데, 삼촌이나 고모는 귀엽게만 보이는 조카들에게는 응석을 받아 주는 편이다. 어미만 졸졸 따라다니는 아이가 밉살스러울 때도 있어서 어미 곁에서 떼어놀 심사가 작동되기도 한다.

애가 야단이라도 맞으면 할머니가 없는 바에야 바로 옆에 있는 삼촌 고모와는 아삼육이 되어서 때론 우상의 대상이 되기가 쉽다. 제 동무한테 "나는 우리 고모가 젤-로 좋다" 하는 꼬맹이의 말을 떠 올려보라! 그러니 어린 조카에게는 습성이나 인성형성에 한 몫을 하게 된다. 다음이 사촌(四寸) 형제자매간인데 지금은 없는 일이 되어버렸지만 예전의 삶의 모습은 사촌간도 한 집에서 많이 살았다. 작은며느리를 보면 바로 살림을 내지 않고 몇 년이고 같이 살다가 어느 정도 때를 봐서 살림을 내보내니 그 자녀들은 사촌들끼리 한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기 마련이었다.

촌수만 벌어진 형제이지 지금의 사촌이란 생각과는 현격한 차이가 나는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몇 대가 한 집에서 단란하게 사는 모습은 주위로부터 부러움의 대상이요 나라에서도 포상해주는 법이었다. 이렇게 대가족으로 어울려 사는 풍습이 우리네 모습이었다. 그래서 삼촌이 같은 또래일 경우를 보면 숙질간에 바로바로 장가를 들다보니 미처 살림을 나지 못한 처지에는 그 자녀들 역시 오촌(五寸) 간이 됐어도 한집에서 지내기 십상이었다. 그러니 사촌 다음의 오촌숙질(五寸叔姪) 간의 당숙(堂叔) 또는 당고모(堂姑母)란 칭호가 역시 그런 집인 당(堂) 자의 쓰임새가 어울리지 않는가? 여기까지가 한 울타리인 셈이고 그 안에서 살았던 모습이요 생긴 말이다.

요즘에 와선 그런 모습을 얼마나 헤아릴지는 모르겠지만 스무 살 안짝에 혼인들을 하는 예전에는 일흔만 넘겨도 한 집[堂]에서 오촌이 났다. 골육지친간의 온갖 일들아 더도덜도 없이 다 이런 촌수 틀 안에 있다.

이제는 그 골육지친(骨肉之親)의 세계가 또 다른 모습으로 그려지게 되었다. 호적부가 없어지고 가족부가 생겼으니 여기서 가족이라는 낱말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그 흐름을 보면 예전과 지금의 의미는 많이도 달라졌다. 원래 가족(家族)이란 말은 어느 한 가문의 일족(一族)이었지 한 식구라는 뜻은 드물었다. 옛 책을 통해본즉 일족이란 의미에서 차츰 한 집의 식구로 변해왔음이 역력하였다.

그러니까 가족이란 말이 애초에는 동성동본의 일족이나 최소한 동고조 팔촌 안에 드는 집안이었던 셈이다. 그러다 한 집 식구란 말로 변해버렸다. 한 집 식구란 말로는 가속(家屬)이란 말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더구나 가족(家族)이란 낱말은 일제에 의해 한 집의 식구란 뜻으로 더 심화된 낱말이었다.[일어<家族かぞく; 카조쿠]. 그래서 가족 대신에 가속(家屬)이란 말은 일본어 등쌀에 밀려나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우리의 정통대로라면 지금의 가족이란 말을 가속(家屬)으로 써야 맞는 것이다.

참여정부는 호적부를 일제의 잔재요 남성위주라고 우겨서 그 자체를 없애고 가족부로 만들었다. 물론 맞는 말이다. 통감부(統監府)가 들어선 구한말에 민적부(民籍簿)가 생기고 곧바로 총독부(總督府)가 들어서서 서력 1923년에 조선호적령으로 호적부(戶籍簿)가 생겼다. 해방이 되었어도 호적부에 쓰인 일본어는 글자만 우리글자로 바꾸었을 뿐 그 틀은 그대로 놔둔 채 조금씩 다듬기만 하다가 참여정부는 호적부(戶籍簿)를 아예 없애고 가족부(家族簿)로 탄생시켰다.

다른 한편의 생각에는 선인들의 맥이 이어지는 한에는 가족(家族) 대신에 가속(家屬)이란 말로 가속부(家屬簿)가 되었음직도 하였다. 허나 일본의 책략(策略)에 의한 언어 습관은 이미 몸에 배어서 가속부(家屬簿)란 말로 해보면 의미가 전연 달라져 버린다. 그렇다면 호적부도 일제가 만들었으니 호적이란 말 자체도 일본식의 말이냐면 그건 아니다. 인간이 사는 세상에는 호적은 기본이므로 그것을 표현하는 말이 호적(戶籍)이든 가적(家籍)이든 또는 민적(民籍)이든 간에 인간이 사는 집단속에는 반드시 그 실정을 헤아리는 문서가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조상을 섬기고 터를 지키며 대물림을 하는 체계로써 관가에서는 호적으로 담았고 민간에서는 일족마다 족보로써 담아왔다. 역대로 호부(戶部) 또는 호조(戶曹)가 있었고 고을마다 육방(六房)중에 호방(戶房)이 있어서 고을 백성들을 기록하는 호적(戶籍, 또는 장적(帳籍))을 맡았다. 한 집의 주인은 가주(家主) 또는 호주(戶主)란 말을 썼고 다만 일제에 의해 호적부가 다듬어졌던 것이다. 일본의 잔재 잔재하지마는 잔재(殘滓)라는 낱말도 일본서 나온 말이요 우리 조상들은 이 말을 거의 쓴 적이 없었다.

차라리 우리말에 ‘찌꺼기’란 말이 더 나은데 오백년 동안의 실록에서도 천년을 헤아리는 문인들의 문장에서도 잔재(殘滓)라는 말은 거의 안보인다. 남성위주라는 남성 역시도 일본서 나온 말이요 물론 여성이란 말도 일본서 나온 말로 확인한 필자로서는 과연 우리는 무었을 버리고 무었을 얻기 위함인가? 하는 생각에 골똘해질 뿐이었다.

이 땅에 가꿔진 습속에 따라 서린 정서를 거스를까싶어 조심하며 살던 사람들에게는 가족부의 좋고 궂음을 떠나서 뭔가 허망한 가슴을 쓸어내리는 얼굴이 역력하였다. 소위 보수층의 얼굴이다. 그들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해방을 맞아서는 살던 땅이 양쪽으로 갈리고 극심한 좌우대립은 필연코 이어진 동족간의 피비린내나는 싸움판에 끼여 치를 떨며 살아온 세대들이다. 뭔가를 지켜야 한다는 심리가 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대선 하루 전에 야당에서 개가 나와도 당선된다는 외신보도를 듣고는 아뿔싸! 가족부가 일찌감치 한 몫을 했거니 하는 생각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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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족보 오재일 원장]

▶ 1989년 안의 김씨 족보 편찬
▶ 1992년 경주 손씨 언양공파보 편찬
▶ 1995년 한국 인물 정보 연구소 부소장
▶ 2002년 연안이씨 진사공파보 편찬
▶ 2006년 한국고서연구회 이사
▶ 2007년 조선왕조실록 오류 수정 작업- 번역본 오류신고 400건 이상, 원문수정 2000건 에 3000자 이상신고 (최다 오류신고자로 선정)
▶ 현재까지 논문 3편 외, 칼럼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