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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일원장의 족보 칼럼] 일제가 지은 고종과 순종의 묘호

보건복지타임스 2007. 11. 28.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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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일원장의 족보 칼럼] 일제가 지은 고종과 순종의 묘호
고종과 순종은 일제가 지은 묘호다.
홍재희 기자 (기사입력: 2007/11/28 17:41)

임금님을 나타내는 말은 어떤 것이 있을까?
제왕, 인군, 군주, 주상, 상감마마, 전하, 폐하, 나라님 등이 생각나고 세자에게는 저하나 각하 등의 낱말이 떠오른다. 이 중에 각하는 한때 신하가 세손을 부르는 칭호로 쓰였다가 일본이 들어와서는 내각의 총리에게 붙이던 칭호였는데 우리는 대통령에게 붙이는 칭호로 썼다. 지금은 님으로 쓰게 돼서 그나마 다행이다.

사후의 왕을 칭하는 말에는 ‘~왕’과 ‘~조’ 또는 ‘~종’이 있다. 중국의 한나라 때부터 시작된 ‘~조’나 ‘~종’을 붙이던 제도는 당나라 때에 다져지고 우리는 신라 때까지 ~왕으로 쓰다가 고려부터 조종을 붙여서 나라의 체모를 살렸다. 이러한 ~조나 ~종은 묘호(廟號)로써 즉 그 임금을 지칭할 때에 쓰는 사당이름으로 흔히 임금의 시호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이처럼 임금님 이름은 전혀 부르지를 않으니 세상 사람들이 묘호를 임금님의 이름자로 알기 쉽다. 고려는 말엽이 가까워질 쯤에는 몽고가 침입하여 원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어 원나라의 사위나라[부마국]가 되었다. 고려가 망할 때 까지 왕으로 칭하게 되었는데 왕비는 공주라 칭하는 등 속국으로서의 한 등급이 내려간 말을 쓸 수밖에 없었다. 즉 원나라 황제의 사위인 고려임금은 사후에 조나 종을 붙일 수가 없었고 왕비는 원 황제의 공주이니 공주칭호 그대로를 쓴 것이다.

그래서 한 예로 공민왕의 왕비는 ~왕비가 아닌 노국대장공주인 것이다. 나라의 힘이 약해서 속국이 되어 짊어진 지난 과거사를 지울 수는 없는 일이다. 고려가 망할 무렵의 임금님 중에는 사후의 임금칭호마저 없는 비운의 왕이 두 분이나 있다.

바로 우왕과 창왕이다. 우왕은 공민왕의 대를 이은 임금으로 이름자가 우(禑)자여서 성명이 왕우(王禑)인데 왕위가 아들 창(昌)에게 넘겨지고 그 아들마저 왕위를 빼앗기게 된다. 왕씨가 아닌 신돈(辛旽)의 자식이라는 명목 때문에 신우(辛禑)로도 불린 이 임금은 왕씨가 아니므로 고려왕의 정통을 삼을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아들과 함께 이성계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세상 사람들이 그의 이름자를 따서 그냥 우왕이라 하고. 그 아들도 역시도 이름자를 딴 창왕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사후에 받드는 묘호도 아니요 그저 그 임금을 지칭하는 말로써 쓴 우왕(이름이 왕우인 왕), 창왕(이름이 왕창인 왕)일 뿐이다. 만약 이성계가 이처럼 왕위에서 쫓겨났더라면 세상 사람들은 아마 성계왕이라 했을 것 같다는 얘기다. 창왕 다음의 임금은 필히 왕씨 성받이에서 추대하여야 함에 신종의 7대손인 왕요(王瑤)를 추대하니 이가 곧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이다. 이성계는 수창궁에서 명목상으로 왕요(王瑤)로부터 양위를 받아 새 임금에 오르고 이내 왕요를 원주에 내쳐서 공양군이라 칭하고 삼척으로 옮겨서는 끝내 죽였다.

하지만 조선 조정에서는 이 임금은 공양왕이라 하고 사후의 임금대우는 해주었다. 조선조에는 왕위에서 쫓겨난 임금이 세분이 있다. 노산군과 연산군, 광해군이다. 노산군은 삼촌 수양대군에게 쫓겨나 영월에서 일생을 마치지만, 몇 대 후에 복위되어 묘호가 단종으로 되고 능 이름도 장릉이요 노산군일기는 단종실록으로 되었다. 참으로 많은 인고의 세월이 흘러 사육신 등이 만고의 역적에서 만고의 충신으로 받들어진 결과인 것이다.

연산군과 광해군만이 끝내 사후의 임금대우를 받지 못하여 무덤을 묘라고만 할 뿐 능이라 부르는 법도 없고 임금으로 있던 시절의 일기도 그대로 연산군일기, 광해군일기로 표기되며 더구나 종묘에 제사드릴 사당이 없기 때문에 묘호도 없다. 임금으로서의 덕망이 없는 탓에 신하들에 의해 쫓겨난 군주의 허망함이 엿보인다. 나라가 망한 뒤에 살아생전에 망국의 한을 안은 고종과 순종은 과연 어떠했는가? 아직 살아있어서 묘호는 없으니 당시 상황제는 덕수궁의 이태왕이라 칭하게 되고 황제는 창덕궁에 거처하는 이왕이라 칭하였다.

역시 한 등급이 깎인 칭호다. 십년 세월이 지나 상황제가 승하하자 고종이라는 시호가 생겼다. 총독부 시절이라 산하의 이왕직 장관은 전례를 따르듯이 세 개의 묘호 글자를 장만하니 일본 천황은 고종으로 칙지를 내린다(1919.1.27)라는 식의 묘호가 정해졌다. 고려 말기처럼 격을 낮춰서 ‘~왕’이라 하지 않고 ‘~종’을 붙였는데 합방이라는 명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이미 시해당한 왕비 명성황후의 휘호가 있던 터라 쉽게 ‘종’자를 썼는지는 몰라도 우리네가 지어올린 칭호는 아니다.

그 뒤로도 승하한 창덕궁의 이왕 역시도 마찬가지로 순종이라는 묘호를 얻고(1926.5.1) 먼저 세상을 뜬 순명효황후와 함께 유릉에 묻힌다. 비운의 두 임금은 일제에 의해 정해진 대로 묘호를 쓰고 있지만 어찌 하겠는가 ! 나라를 통째로 갖다 바친 친일작당 놈들에게 내둘려진 아린 가슴이요 할퀴고 간 한 단면을 보는 것이다. 지금도 일본에 빌붙었던 자손들은 친일의 잣대를 조선백성을 위한다는 쪽으로 재고 있는 것인지, 그래서 일본 천황으로부터 혜택을 입은 땅이며 재물을 자손 된 도리인양 챙기는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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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족보 오재일 원장]

▶ 1989년 안의 김씨 족보 편찬
▶ 1992년 경주 손씨 언양공파보 편찬
▶ 1995년 한국 인물 정보 연구소 부소장
▶ 2002년 연안이씨 진사공파보 편찬
▶ 2006년 한국고서연구회 이사
▶ 2007년 조선왕조실록 오류 수정 작업- 번역본 오류신고 400건 이상, 원문수정 2000건 에 3000자 이상신고 (최다 오류신고자로 선정)
▶ 현재까지 논문 3편 외, 칼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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