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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일원장의 족보칼럼] 신식 혼례에 치인 해묵이 달묵이

보건복지타임스 2008. 1. 28.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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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일원장의 족보칼럼] 신식 혼례에 치인 해묵이 달묵이
홍재희 기자 (기사입력: 2008/01/28 16:40)

우리의 습속에는 관혼상제가 주류를 이루었다. 세상에 태어나면 홍역을 치룬 뒤로 성인이 되어 어른행세를 하게 되는 관례를 치루었다. 이것도 양반집이나 그 후예들이 하는 일이지 상민들에게는 호사스런 일인지라 관례를 치루는 법은 드물고 막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아예 없는 일이었다.

이 관례를 치루자면은 그만큼의 격식을 요하는 것이기 때문에 글줄이나 잡혀있는 집안에서 행하는 일이었다. 관례 때에는 호적에 올리는 정식 이름 외에 자(字) 라는 별도의 이름을 얻는다. 하지만 이런 관례가 없는 이들에게는 어렸을 적의 천한 이름을 지닌 채로 바로 있는 혼인 때나 돼서야 상투를 틀어 올린 어른대열에 서는 것이다.

관례에 이어 바로 혼례가 있게 되는데 이 혼례가 인생에 가장 큰 변수로 쳤다. 그래서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로 여겨 대사치룬다고 하고 사내는 장가간다든가 장가든다고 하며 여자는 시집간다고 말한다. 장가를 보낸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우리의 먼 옛날 습속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사내가 계집의 집으로 찾아가 연을 맺고자 청하고 허락이 되면 이른바 서옥(壻屋)이라는 별채에서 살면서 자식을 낳고 지내다가 나중에 식구들을 데리고 사내집으로 돌아오는 풍습이 오래도록 있었다. 그래서 장가보낸다는 말이 생긴 것이며 여자는 사내집으로 돌아온 그 때부터가 시집살이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옛 문헌에도 전하는 고구려의 혼인풍속으로 이를 서옥제(壻屋制)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신혼 때에 이루어지는 일종의 데릴사위제인 것이다.

이런 풍속은 조선 중기를 넘어서서야 바뀌게 되는데 이는 조선이 성리학을 숭상하는 나라가 되자 유학의 정통 원리에 맞춘 관혼상제로 인해서 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유학을 내세웠어도 혼인풍습만은 유교식 친영제도가 애시 당초 잘 되지를 않았다. 친영(親迎)이란 신랑집에서 신부를 맞이하여 예를 올리는 것을 말하는데 서양의 혼례식에 밀리기까지는 우리의 데릴사위제 같은 서옥제 형태는 남아있었다. 선초에 세종임금도 온 백성에게 주가가례(朱子家禮)에 의한 혼례제도를 심으려고 여러 번 시도하고 법제화도 꿈꾼다.

하지만 누천년을 내려온 습속이 배어있는 백성들인지라 이를 법으로 막는다는 것은 죄인만 많아진다는 의견을 받아들여서 종친[왕가]부터 모범을 보이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다. 먼저 시도했던 호락호락한 성미의 태종도 어쩌지를 못했던 터였다. 그러고도 한 삼백년이 지나고야 바뀌는데 개화기부터는 일본의 성화와 서양문물에 밀려나 지금은 말끔히 치워진 모습이다.

이젠 신행(新行)간다 또는 재행(再行)간다는 말도 없어지고 더구나 서옥살이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해묵이 달묵이란 말도 언제인지도 모르게 없어졌다. 해묵이란 신부집에서 혼례를 올리고 거기서 해를 넘기도록 처가에서 묵다가 돌아오는 기간을 이르는 말이고 달을 넘기면 달묵이라 했다. 여러 해나 여러 달을 묵기도 하지마는 일이 바쁜 백성들에게는 부역이라든가 바쁜 농사철이 한달묵이가 되느냐 두달묵이가 되느냐로 작용되었을 것이다.

친영(親迎)쪽으로 접어들고 개화기를 지내면서도 혼례는 신부집에서 올리고 사흘 아니면 당일로 시가로 오던 풍습이 남아 있었는데 신식혼례에 밀리면서 쓰던 말까지 사라졌다. 그래서 지금은 그걸 당연히 여기고 끄집어내어 말하는 자체가 오히려 이상하다고 푸대접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렇게 우리의 모습들은 안방에서 밀려나고 쓰레기장에서 뒹굴다가 썩고, 어쩌다 신수가 좋은 놈은 박물관에 들어가 우리네 옛 모습은 이랬노라고 보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의 줏대가 헤매이고 있는 것이다.

혼례(婚禮)란 말도 일본서 즐겨 쓰는 결혼(結婚)이란 말에 밀려났고 찾아올 손님을 굳이 불러대는 청첩장(請牒狀)이란 말도 자리를 잡았으며 혼인잔치는 피로연(披露宴)이란 일본말로 자리 잡았다. 물론 주례자(主禮者)니 사회자(司會者)니 하는 말도 일본서 나온 말로 혼례뿐만이 아니라 여느 모임에서나 쓰는 말이 되었다.

지식인들 사이에 결혼(結婚)이란 말은 단순히 남녀의 결합으로 보는 일본어데 비해 우리는 가문과의 연을 맺는 혼인(婚姻)이란 말로 가늠하곤 한다. 하지만 옛 책에서 확인한 바로는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다만 우리는 혼인이라는 말을 결혼보다 훨씬 많이 썼을 뿐인데, 어쨌든 결혼이라는 말에 담긴 말들은 거의가 일본산 말임은 틀림없다.

그러한 말들로는 결혼예식장, 결혼기념일, 결혼사진, 결혼상담소, 연애결혼 결혼행진곡, 등등에다 연애, 신혼여행, 피로연, 청첩장, 축사, 축가, 면사포 등의 낱말이 일본서 건너와 자리를 잡았다. 연애라는 말에는 여기에다 재주를 부려진 연띄운다는 말도 생기듯이 이 땅에 자리 잡힌 말들이다. 그러하면서 없어진 말들이 즐비하다. 댕기풀이, 신방엿보기, 청실홍실, 사선(紗扇)뺏기, 사모관대(紗帽冠帶), 함진아비, 상객(上客), 인접(引接), 신랑매달기, 목기러기, 족두리, 연지곤지, 원삼, 요강 등등을 들 수 있다.

요즘은 혼기가 늦춰지면서 신혼시절의 신부의 다홍치마의 앳된 모습이 사라졌다. 못해도 십년세월은 늦어져서 서른을 넘나들다보니 시부모가 ‘애기’ 또는 ‘새아가’ 라고 부를 정서가 아니요 어린 티가 없는 며느리인 것이다. 며늘아기란 말에서 아기가 빠진 그냥 며느리다. 아가라는 말로 하기가 버겁고 옛 법도가 무너진 탓인지 이름을 불러 주는 풍습으로 가고 있다. 아직은 주위에서 불러주는 새댁이란 말은 남아있다.

하지만 정씨 집에 시집가면 ‘정실이’, 장씨 집에 시집가면 ‘장실이’ 라고 친정 쪽에서 불러주던 칭호도 사라졌다. 그저 ‘영자’ ‘순자’ 하거나 애들 이름을 따서 부르거나 한술 더 떠서 ‘미쎄스 김’ 하는 시대로 가고 있다. ‘충주댁’ ‘서울댁’하던 말도 없어졌는데 이런 댁호를 시골 촌닭처럼 여기는 풍습이라 그렇다.

도도히 흐르는 물결 속에는 허기진 배를 내 것을 두고도 남의 것으로 채우면서 점점 사라져가는 말들을 짚어보았지만 아니 이젠 시집살이에 웬 시어미살이란 말까지 나온다. 난감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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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족보 오재일 원장]

▶ 1989년 안의 김씨 족보 편찬
▶ 1992년 경주 손씨 언양공파보 편찬
▶ 1995년 한국 인물 정보 연구소 부소장
▶ 2002년 연안이씨 진사공파보 편찬
▶ 2006년 한국고서연구회 이사
▶ 2007년 조선왕조실록 오류 수정 작업- 번역본 오류신고 400건 이상, 원문수정 2000건 에 3000자 이상신고 (최다 오류신고자로 선정)
▶ 현재까지 논문 3편 외, 칼럼 게재

[더데일리뉴스 / 홍재희 기자]